보성 전통차 농업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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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의향이 숨쉬는 보성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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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124회 작성일 21-03-0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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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義香)이 숨쉬는 보성차밭을 찾아서

                   

  차밭의 봄빛이 우러나오는 녹색의 차밭에 운무 낀 차밭의 전경이야말로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선물 중에 우리나라 제일의 선물이라는 생각에 보성 차밭을 보고간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그래서 요즘 보성 차밭을 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연 400∼500 만의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모두가 보성 차밭을 보기 위해서이다. 거기에는 미래의 차인으로 자라나는 수학 여행단의 학생들로부터 허니문의 단꿈을 꾸는 신혼여행지로의  수 많은 연인들, 가족, 친지와 함께는  물론 신이 주신 아름다움을 화폭에, 카메라의 영상에 담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곳을 보고 가는 사람마다 약간 다른 평을 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보성 차밭의 아름다움을  신선(神仙)들만이 놀 수 있는 곳으로 비유하여 선경(仙境)이라 비유하는 가하면 외국의 어떤이는 보성 차밭을 보는 순간 한국의 숨겨져 있는 땅이라면서 보성 차밭을 보고 가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한국을 보고 가지 못했을 것이라 하면서 보성 차밭에 왔던 것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어느 외국인을 보면서 보성 차밭의 아름다움은 신이 인간에게 준 우리 나라에 주신 선물 중에서 단연 의뜸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사실 중국, 일본등 차 재배가 많은 여러 외국의 차밭을 보아도 보성의 차밭 만끔 아름다운 차밭은 보지 못했다.  물론  차밭의 규모는 우리나라 차밭보다 비교가 않되리만끔 크게 보였지만 보성의 차밭은 우리나라 고유의 크고 적은 산등성이의 아름다운 선에 맞추어 나타나는 차밭이랑이 빚어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에서 나타내는 아름다움은 무릇 세계적이라 할 것이다.

여기 이 곳 보성 차밭의 아름다움을  지금 현재의 차밭으로 자리 잡기 까지에는 아름다움 만끔이나 그 밑바닦에 서려 있는 의향(義香)의 숨결이 숨어 있다. 무릇 한 송이 국화꽃이  아름다움으로 피우기 위해서 오뉴월 무서리를  맞고 이겨내어야만 그 아름다움이 더 하듯이 보성의 차밭이 지금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기까지에는 보성 차밭의 저 밑바닦에서 숨쉬고 있는 보성인(寶城人)의 의향(義香)이  숨어 있기에 지금의 아름다움은 더 높고 귀함이 깃들어 있어서 지금 저 많은 이들이 찾아들고 있을 것이다. 

보성(寶城)을 우리는 3보향(三寶香)의 고향이라 하여 보성에는 3가지 향(香)이 있는데 그 첫째가 우리나라 차 재배의 30%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제일의 차를  생산하는 다향(茶香)이며 두 번째 향(香)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대맥을 이루는 서편재(강산재)가  피어나는 고을로 예향(藝香)이라 부르는 향(香)이 그 두번째 향(香)일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향기(香氣)로 일컬어지는 향(香)이 의향(義香)이다.
 
의향(義香)이란 글자에서 나타내듯이 의(義)로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보성의 의향(義香)을  이야기 할 때 대체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일본제국주의가 한창 맹위를 떨치는 시절 우리 민족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민속주를 제조하는 법령(法令)을 공포하자 보성 향교(鄕校)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대응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법(法)이 무산되게끔 하자 일본인들은 이 곳 보성을  가르껴 가장 그들이 다루기 힘든 지역이라 하여 특별히 보성 사람을 일인 식민 통치에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불러왔던 것을 후세 많은 사람들은 보성의 의향(義香)의 숨결은  저 깊숙히 묻어 둔 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데로 보성을 부정적인 지역으로 편하하여 부르는 그 들을 볼 때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의(義)로움이 숨쉬는 곳에 어찌 이 이야기가  한 곳에만 보성(寶城)의 의향(義香)이 서려 있을까! 우리 차를  대표 할 수 있고  지금의 저 아룸다움을 지금에 남기기까지에는 여기 이 곳 차밭을 조성하는 시기에도 보성의 의향(義香)의 숨결이 고동치고 있었기에  보성 차밭의 빛깔은 더더욱 푸르러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 차 재배 역사가 20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듯이 여기 이 곳 보성의 차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과 똑같이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 할 수 있는 것은  보성에 가보면 쉽게 느낄수 있다. 보성 지역 그 어느 곳 뒷산을 가 보아도 거기에는 재배 차 외에도 자생차가 자라는 곳을 볼 수 있다. 이미 본 필자가 조사를  마친 곳만도 20 여곳이 넘을 정도로 많은  보성 전역에 널려 있는 것을 보나, 보성 벌교의 징광 지역 차 재배 유래, 지역명에 차(茶)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유명한 득량면 다전(茶田) 마을의 차 재배 유래, 지금 우리나라 차 재배 지역으로 가장 큰 면적을 갖고 있는 회천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 고려중엽부터 조선초기까지 관청에 차를 생산하여 공물(貢物)로 바치는 웅점다소(熊點茶所)가 설치 운영된 것을 알게 된다면 보성차의 유구한 긴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곳에 우리나라를 전쟁물자 생산 전진 기지쯤으로 생각한 일제가 그대로 둘 리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경성화학의 관서 페인트회사를 앞세워 지금의  대한다원 포장에 차밭을  30ha 조성하게 되었단다. 이런 사실은 기 알만한 차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허지만 지금의 대한다원 차밭은 민족 상쟁의 6.25 전쟁시 일인들이 조성한 차밭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전쟁후 인 1959년에 해양기술원(?)으로부터 인수하여 지금의 차밭으로 다시 만든 차밭이 지금의 차밭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처음부터 지금의 차밭을 다시 조성하여 차밭을 관리하고 있는 대한다원 관계인에게 물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 중 부분적인 면만을 알고 있는 요즘 몇몇 분네 자칭 타칭 우리나라 차(茶)지도자라는 분들이 대중 매체란 거대한 힘을 빌려 지금의 우리 차는 일본 차라는 국적불명의  하시는 소리에  우리 차를  아끼는 이들이라면 분노하면서  귀와 눈을 더렵혔다고 맑은 물을  수 없이  찾았을 것이다. 그 분님들 하시는 말씀이 보통 사람이라면 말하기 어려운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을 큰 용기를 갖고 우리차를 사랑하다는 미명하에 혓끝만을 발름거리는  미사어를 동원하여 우리차는 모두가 일본차라는 둥, 수 없는 허튼소리를  들을 때는 우리네 민족 자존의 의향(義香)이  숨쉬고 있는 보성차를 잘 알고 하는지 반문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본(本)고(考)의 내용과 약간 다른 이야기로 더 이상의 지면을 더렵혀서는 안되겠기에 이쯤으로 줄이지만  그 님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당신님들은 우리차와 차를  알고 있되 모두 알지 못하고 부분만을 알고 있는 절름발이 지식에서 빚어지는 허튼 소리는 이제 그만 하고 우리차를 사랑하는 모든 님들 앞에 정중히 그간의 사실을 모두 사죄하실 것을 정중히 주문합니다.

일제는 1930년대 말기에는 대동아 전쟁으로 혈안이 된 그들은 보성에 차을 생산하여 전쟁 물자 및 자국의 물자 확보을 위해 우리나라 차 재배로  제일의 곳을 물색하다 지금의 보성 대한다원(大韓茶園)이 있는 곳을 물색하게 되었단다. 이 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살아오신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에 살고 계시는 선대규(81세), 대한다원 바로 앞마을인 삼산마을에 살고 계셨던 구제인(80세)에 의하면 처음 일제가 차를 심기 위해 지역민인 보성인(寶城人)에게 차를 심어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보성인들은 우리민족을 말살하는 일인들의 시책을 순수히 따라 주는 것은 의(義)롭지 못한 것이라 하여 차밭 만드는데 노력 동원에 모두 참여하지 말 것을 동맹으로 맞섰다고 한다.

일제는 그 시절 우리민족에게는 땔감을 거의 나무로 하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땔감을 채취하는 것을 지역 일제 앞잡이쯤으로 여겨지는 지금 보성군청의 전신인 산림계장인  김 xx라는 앞잡이를 동원하여  차밭 조성에 비협조적인 대다수의 보성인들에게 산에서 땔감 채취를 막았다 한다. 그 중에 그들의 동원에 어쩔 수 없이 포섭된 사람들에게는 땔감 운반 수단인 지게를 버티고 서 있는 다리에 『入山禁止』 라고 불도장 철인을 찍어서 그들과 호의적인 사람과 구별하여 이 불도장 철인이 찍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무를 채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다.
 
해방이 되자 일제 앞잡이인 김xx라는 분은 지역에서 의(義)롭지 못한 사람으로 보성에서 살지 못하고 서울로 도망하여 살다가 보성인들의 계속적인 추적에 못견뎌 그 집 가문이 거의 멸문 되었다는 확실치 않는 소리만이 전하여지고 있을 뿐이다.

일제 36년의 아픈 치욕을 단절하지 못한 아픔이 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곳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들이 변절 된 애국과 나라운영을 빌미로 다시 기용된 아픈 우리 역사와는 달리 보성에서는 유달리 다르게 보성 지역민 스스로 의(義)롭지 못한 사람은 발붙일 수 없도록 했던 것은 저 밑에서 보성(寶城)을 지지하는 의(義)로운 큰 맥(脈)인 의향(義香)의 맥이  흐르고  있어서일 것이다.

최근 우라나라에서 배타적으로 그 특정 지역의 지역성을 생산된 농산물에 인증해 주는  지리적 표시1호로  차가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보성의 차가 차지한 것을 어찌 우연쯤으로만 생각할것인가. 이는 분명 보성에서 생산되고 있는 차에는 다른 차에서 느낄 수 없는 의향(義香)의 숨결이 숨쉬고 있기에  지금의 보성차로, 지금의 보성 차밭으로  우리나라 의뜸의 차로 영원 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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