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전통차 농업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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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보성 봇재 천여 년 전 봇골다소(蒲谷茶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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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93회 작성일 21-03-0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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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성의 차향(茶鄕)과 다소(茶所)들

우리나라 차의 대표 산지인 보성에는 일찍이 신라 시대에 이미 차 마을[차향(茶鄕)이 있었다.

가을전 차향(加乙田茶鄕)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현재 웅치면 중산리 약산(藥山, 약찌미뻔덕지) 마을이다.

차향이라는 이름으로 보았을 때 차를 재배 가공하여 신라 조정에 공납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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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전차향과 가을평다소 일대 (사진 : 김현호)




여기서 800m 동으로 가면 용반리 대은마을 앞에 비서리밭등이 있다.

이곳이 고려 초기에 가을전 차향을 이어 뇌원차를 생산하여 고려 황제에게 직접 공납하던 가을평 다소(加乙坪茶所)이다.

뇌원차는 당시에는 ‘로원다(腦原茶, Rowonda)’로 불렀을 것이다. 뇌원차는 고려(高麗)의 가장 대표적인 ‘고리다(高麗茶, Korida)’이다.

한자 려(麗)는 당시에 ‘리’로 차(茶)는 ‘다’로 발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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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한 로원다 : 고급차 다자색(茶紫色)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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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한 뇌원차(로원다)






2. 봇골다소(蒲谷茶所)의 시작

이밖에 다소가 하나 더 있으니 봇골다소(蒲谷茶素)다. 보성 회천면 봇재 양동에 있다.

이곳은 국가중요농업유산인 계단식 보성 차밭이 집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끊어진 역사여서 모르고 있을 뿐 봇골다소가 천여 년 전부터 있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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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골다소 일대(양동 부근)




우리 역사는 우여곡절이 많고 단절된 문화도 많았다. 차도 그렇다.

고려 시대의 차를 재배 가공하여 고려 황제에게 직접 공납하는 다소도 고려 중기 이후 폐해지고 다 없어졌다.

조선조에서도 다소 지역은 차를 재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된 이후 우리 차 농민들은 일찍이 차를 재배했고 재배 적지인 이곳에서 차를 가꾸고 있다.

천여 년이 넘는 역사에 유적 유물 등 사적과 사료가 매우 빈약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피기 어렵다.

오로지 지금 내려온 땅 이름만 있으니 이것을 기준으로 언어 문자 역사학으로 살필 수밖에 없다.

蒲谷所(포곡소)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지지(1866) 등에 있다.

3. 봇골(蒲谷)의 뜻

(1) 봇골의 음사(音寫)가 蒲谷(포곡)

蒲谷(포곡)은 무엇일까? 한자의 뜻으로 풀이하면 부들이 자라는 골짜기 ‘부들골’이 된다.

골짜기에 자그마한 계곡이 있어 부들이 자랄 환경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여기서는 부들이 아니다.

우리말의 소리를 한자로 빌어 음차(音借)했다고 보아야 한다. 포곡을 둘러싸고 있는 재(고개)가 ‘봇재(保峙, 樑峙)’이며

봇재 아래엔 ‘봇재골’이 있다. 또 봇재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 양동( 陽洞 ← 樑洞 ← 蒲谷(보곡) ← 봇골)으로 원래 ‘봇골’이다.

따라서 이 한자어 ‘蒲谷(포곡)’은 ‘봇재’의 음사(音寫)로 본다.

경덕왕 757년에 지명을 한자의 뜻으로 바꿨기[漢化]에 봇골 지명은 신라 경덕왕 757년 이전에 생긴 것이다.

이후라면 蒲谷(포곡)으로 음사하지 않고 그 뜻으로 樑谷(양곡)으로 불렀을 것이다.

'보ㅅ재' 아래에서 씨족 단위로 '고리'를 이뤄 살아 봇골의 원형음(原形音)은 "보고ᄋᆞᆯ" 였을 것이다.

(2) 당시 蒲谷(포곡)의 발음은 <보곡>

원래 우리말 입말로 부르는 ‘봇골’은 신라 경덕왕 이전에 한자로 음사 하여 ‘보곡(蒲谷)’으로 쓰였다.

蒲(포)의 중고음(中古音)은 ‘보(bo, 並遇模)’이므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보(bo)’로 발음되었다.

당시에 한자의 발음은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당대발음(唐代發音)도 bho(ᄫᅩ)다.

따라서 한자로 쓴 蒲谷은 현재처럼 포곡으로 발음하지 않고 ‘보곡’으로 발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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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봇골은 <보ㅅ골>로 이를 음사한 한자어 <蒲谷(보곡)>과 아주 서로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蒲가 지명으로 쓰인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산서성 순(舜) 도읍지인 보주(蒲州) 보판(蒲阪)처럼 지명으로 쓰인 사례가 있다.

드물게 경안천 주변에 창포가 많아 부른 경기 용인의 포곡(蒲谷)도 있다.

‘골 곡(谷)’ 역시 우리말과 한자어 발음이 비슷하다. 결국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만들었기에 그렇다. ‘골’의 원형어(原形語)는 ‘고리(kori)’라 한다.

우리 조상들이 씨족 가족 단위로 둥그렇게 ‘고리(環)’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고리는 골짜기의 골(谷)과 고을(洞, 邑落)으로 분화되었다.

따라서 보고라는 봇골도 봇고을(양동)도 되는 것이다.




(3) 우리말 들보의 ‘보’

우선 우리말 ‘보’에 대해 살핀다. 우리말로 <들보 보(椺)>, 물막이 보(洑)가 있다.

한자어에 없는 말이어서 ( )속의 한자 椺 洑는 우리나라에서 순수하게 만든 문자다.

이 밖에 아기를 업거나 싸는 포대기 보(緥, 俗字 褓), 작은 성 보(堡) 등이 있다.

항간에서 ‘무거운 봇짐을 내려놓고 쉬어가는 봇재’라고 스토리텔링하는 것은 어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양동의 어원 풀이에서 보듯 봇재의 보는 <들보 보(椺)>다.

(4) 봇골에 있는 양동(樑洞)도 봇골(봇고을, 봇ᄀᆞ올)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봇재에 있는 마을 양동이다. 현재 양동은 陽洞이나 그 이전은 樑洞이다.

볕 양(陽)이 아니라 들보 양(樑)을 썼던 것을 보면 위의 예시를 든 여러 ‘보’ 중에서 (들)보의 <보>임을 알 수 있다.

실제 봇재골에서 봇재를 올려다보면 높은 고갯길이 들보처럼 가로로 둘러쳐져 있는 지형을 보게 된다.

우리 선조들이 “보ㅅ재”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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樑洞은 우리말 봇골의 뜻을 살린 한자어로 지명의 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만 그대로 따고

한자를 바꾼 현재의 陽洞은 지명의 뜻과 어원을 지우는, 지명 개악(改惡)의 사례다.



4. 포곡소(蒲谷所)의 기록

(1) 보성군에서 남 20리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지지(1866) 등에 포곡소의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름만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보성군 남쪽 20리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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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 포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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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 : 포곡소



10리 단위로 기록되어 있으니 현 보성군청에서 남쪽으로 7km~9km 내에 있다는 것이다.

 은곡다원 바로 아래 숨은밭골(隱田谷) 봇재골(7km) 에서부터 영천 저수지 끝 지점까지다.

포곡소의 마을이었을 양동은 보성군청으로부터 정남 방향으로 7.4km 지점이다.

(2) 사료 기록의 문제

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으로 향(鄕) 부곡(部曲) 소(所) 등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성군에는 사어향(沙於鄕) 1, 포곡(蒲谷) 미력(彌力) 금곡(金谷) 등 7개 소, 야촌 부곡 등 3개 부곡이 고적으로 나온다.

당시에 군 동쪽 망일포(望日浦)에 염소(鹽所) 있다고 하고 고적에 나오는 나머지 7개 소는 구체적으로 어떤 소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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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 향 소 부곡 / 포곡소



소는 광산물(금, 은, 동, 철)과 해산물(소금, 미역, 물고기), 수공업 제품(비단, 종이, 기와, 도자기, 숯, 먹)과 특수 농산물(생강, 차) 등을 생산했다.

그 중에 다소는 궁중원(宮中園)으로 차를 생산하여 직접 고려 황제에게 공납했다.

사료에 직접 기록된 다소(茶所)는 고창의 용산다소(龍山茶所)와 재역다소(梓亦茶所)와 화순의 와촌다소(瓦村茶所) 뿐이다.

장흥도호부도 소아곡리(小兒谷里) 자기소와 묵방리(墨方里) 도기소 이외에 고적으로 나오는 소가 어떤 소라는 기록 자체가 없다.

고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대부분 직접적으로 소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소의 성격은 여러 다른 자료나 현황 등으로 추정할수 밖에 없다.

5. 포곡소가 다소(茶所)일 가능성

(1) 봇골 부근에 재배차의 흔적인 자생차 존재

봇재 아래 숨은밭골(隱田谷) 봇재골 주변과 고려 시대에 창건한 흑운사(黑雲寺) 부근에 자생차(재배되어 방치된 차)가 있었다고 전한다.

1.6km의 옛 토성(土城)이 있는 활성산(活城山) 아래다. 현재 국가중요농업유산인 계단식 다원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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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중요농업유산 계단식 다원



흑운사는 영천마을에서 활성산으로 오르는 계곡 허궁골에 있었다. 고려 시대 절로 절 주위에 차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도 허궁골과 주변에 차를 가꾸고 있다.

활성산과 연결된 몽중산(夢中山)에도 400m의 옛 궁성(弓城)이 있었고 자생차가 있었다.

 몽중산 다원에 차밭 조성할 때 자생하던 시목(始木) 고차수(古茶樹)가 있어 이곳이 옛날부터 차를 재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대한다원과 몽중산다원과 한국차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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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산다원 고차수



고려의 다소는 폐해진 뒤 차나무는 철저히 파헤쳐졌다. 봇골다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부 차나무는 숨은밭골이나 흑운사 부근에 야생화된 자생차로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봇재소 자리에 남아 있었던 차나무들은 봇재소의 성격이 다소(茶所)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나마 1960년대 후반 대규모 차밭을 일구면서 봇골 차밭의 자생차나무는 사라졌다. 고차수나 자생차나무를 보존하지 못함은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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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득량 차밭밑 고차수




(2) 차와 관련된 지명 존재

봇재 차밭에서 가장 좋은 경관을 자랑하는 ‘초록잎이 펼치는 세상’의 차밭인 옛 전망대 아래 계단식 생개재골 이름은 ‘빛너미’다.

1970년대부터 생엽 확보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튼 제다명인(製茶名人) 서찬식 씨는 ‘빛너미’가 바로 차밭의 초록잎 빛이 넘어가는[빛너미] 골짜기가 아니겠냐 한다.

층층이 함께 어우러져 굽이쳐 넘어가는 초록빛 차밭 물결이 사철 장관으로 ‘초록 찻잎이 펼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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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빛너미와 생개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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