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전통차 농업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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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묘(妙)와 정(精) 담긴 한국차(韓國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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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018회 작성일 21-03-0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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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妙)와 정(精) 담긴 한국차(韓國茶)

- 한국다도(韓國茶道)의 소고(小考) -

- 전남대 대학신문 기고 게재

1982 조석현(전남대 회계과 4)

Ⅰ. 서(序)

우리는 많은 훌륭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바탕으로 서구(西歐)의 문화(文化)를 흡수하지 못하고, 침식(侵蝕)을 당해 그 뿌리를 잃고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새로운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우리의 미풍양속(美風良俗)까지 사라지고 하였고, 음다풍(飮茶風)도 쇠퇴하여 차례(茶禮)에 쓰던 차가 술로 바뀌고 관청(官廳)이었던 다방(茶房)은 이름만 남아 커피판매점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오보(五步)만 걸어도 눈에 띄는 시내(市內)의 다방(茶房)에서는 정작 차가 아닌 서양음료(西洋飮料)인 커피를 팔며 차라고 하면 겨우 보리차, 생강차, 구기자차 등 대용차(代用茶)를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대용차(代用茶)는 차(茶)가 아니며 차(茶)는 차(茶)나무가 있어 일창이기(一槍二旗)의 갓 나온 찻잎을 따서 정성스럽게 제조하여 만든 것으로, 천여년간(千餘年間) 우리 민족(民族)과 함께 숨쉬어온 차[주로 녹차(綠茶)]를 말한다.

한국의 차는 비록 민중(民衆) 깊이 파고들지는 못 했으나 신라(新羅)의 화랑도, 고승(高僧), 시인문객(詩人文客) 등과 궁중(宮中)의 애용품(愛用品)으로부터 민중들의 약용차(藥用茶)와 조상의 차례, 혼례시(婚禮時)의 봉차(封茶)까지 연관을 맺고 차문화(茶文化)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전통차(傳統茶)가 이조의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에 의한 사원차(寺院茶)의 쇠퇴와 그후 각종(各種) 대용차(代用茶)와 술.담배 등 자극적인 기호식품의 애용(愛用)과 서구풍(西歐風)의 커피 문화(文化)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어 우리의 차(茶)와 다도(茶道)를 모르고 일본(日本)에만 다도(茶道)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의 쇠퇴에는 사색을 기피하고 우리의 것을 경시하며 서구문물(西歐文物)을 무조건 선호(選好)하는 정신자세에 더욱 큰 문제가 있다.

88올림픽을 대비(對備)하여 전통문화(傳統文化)의 하나로 문공부(文公部)가 전통차(傳統茶) 보급운동을 전개 시키고 있거니와 그것이 아니라도 한국다도(韓國茶道)의 부흥(復興)은 우리 차문화(茶文化)를 찾는 주체성(主體性)의 확립과 차(茶)를 통한 다도(茶道) 정신의 함양과 구현, 산업상(産業上) 이유(理由) 등으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일본(日本)이 우리의 국사(國史)를 왜곡(歪曲)한다고 신경과민적(神經過敏的)인 말초반응(末梢反應)을 보이기에 앞서 과연 우리 국사(國史)는 스스로 왜곡(歪曲)하거나 잘못 인식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머리 속에는 일본(日本) 잔재(殘滓)가 완전히 불식(拂拭)되었는가.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은 확고(確固)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日本)의 다도(茶道)만이 확립(確立)되어 있고 그들만이 차문화(茶文化)를 누리고 있으며 우리에겐 다도(茶道)란 없는 것인가, 있다면 우리의 차문화(茶文化)는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를 어떻게 전개(展開)시켜야 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차(傳統茶)의 정신(情神)을 올바르게 이해(理解)하고 오늘에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를 되살리는 것은 주체성(主體性)을 확립하는데 중요(重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제2의 물결로 대표(代表)되는 서구산업사회(西歐産業社會)의 발달(發達)과 그에 따른 서양식(西洋式) 사고(思考)패턴으로의 전환(轉換)은 직관(直觀), 신비(神秘), 철학(哲學), 사색(思索)을 잃어가고 객관화(客觀化), 논리화(論理化), 감각화(感覺化)되어가고 있다.

거대화(巨大化), 가속화(加速化), 이원화(離遠化)되어 멋과 여유(餘裕)와 자아(自我)를 상실(喪失)하고 방산(放散)되어가는 현대인에게 조용히 정좌(靜坐)하고 차가 우러나오기를 기다리는 여유(餘裕)와 사색(思索)의 공간(空間)과 중화(中和)의 묘미(妙味)와 선미(禪味) 가득한 다도(茶道)를 체험(體驗)케 하는 매개체(媒介體)로서 전통차(傳統茶)를 권하고 싶다.

Ⅱ. 한국다도(韓國茶道)의 전통(傳統)

1. 한국차(韓國茶)의 전래문제(傳來問題)

일인(日人)들이 그들이 다사(茶史)를 정리하면서 한국차(韓國茶)는 828년 대렴(大廉)이 당(唐)에서 차씨를 심었으나 그들은 그보다 22년 앞선 806년 고오호오(弘法) 대사(大師)가 당(唐)에서 가져와 야마또[大和] 우다(宇陀)에 심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들이 한국차(韓國茶)의 시초를 문헌으로부터 보는 것은 그들의 우위성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주장(主張)임을 직시(直視)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흥덕왕(興德王) 3년조(三年條)에는 사신 대렴(大廉)이 당에서 차(茶)씨를 가져와 왕(王)이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고 차종자(茶種子) 전래를 명기하고 있으나, 김부식(金富軾)은 단서로「차 마시는 풍습은 이미 선덕왕(善德王 : 632~647)때부터 있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로 기술하여 대렴(大廉)의 차씨 전래(傳來) 이전에 벌써 차생활(茶生活)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興德王 三年條 : 自唐廻使 大廉 持茶種子 事來 王使植 智異山 茶自善德王 時有之 至於此盛焉)

그밖에도 「유사(遺事)」에는 63년전인 경덕왕(景德王) 24년(765년) 3월 3일날 충담(忠談) 고승(高僧)이 차로 불공(佛供)을 드리고 왕에게 차를 끓여주던 일을 기록하고 있고, 보천(寶川), 효명왕자(孝明王子)의 차공양, 사포(蛇包)와 원효(元曉)의 차고사(茶故事) 등은 신라시대 음다풍(飮茶風)의 성행과 적어도 선덕왕 때부터 계속 차생활을 해오던 것을 증명한다.

이미 차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대렴(大廉)의 차씨는 신품종(新品種)일 가능성(可能性)과 지리산을 적지(適地)로 선택(選擇)한 점은 지리산에 이미 차(茶)나무가 자생하고 있었을 가능성(可能性)을 제시(提示)하여 준다.

현재(現在) 자생설(自生說)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차(茶)가 태풍권(颱風圈)에 자생(自生)한 점으로 미루어 가능성(可能性)이 있으므로 식물학상(植物學上) 철저한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하겠다. 또 인위(人爲)가 아닌 해류(海流)나 조류(鳥類)에 의한 남래가능성(南來可能性 : 이에는 허황옥(許黃玉)의 봉치(AD48년) 등 가락국전설(駕洛國傳說) 등이 있다.)

또 지리산 시배지(智異山 始培地)가 현재(現在) 쌍계사(雙磎寺) 부근인가 화엄사(華嚴寺) 부근인가도 많은 논쟁(論爭)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앞으로 해결(解決)되어야할 문제이다. 그런데 확실한 근거도 없이 진주다인(晉州茶人)들을 중심으로 한국다인회(韓國茶人會)가 81년 5월에 쌍계사 어귀에 녹차시배추원비(綠茶始培追遠碑)를 세운 것은 문제가 있다 하겠다.

2. 신라(新羅) · 고려(高麗)의 다도(茶道)

신라에서는 충담(忠談), 보천(寶川), 효명(孝明), 원효(元曉) 등의 고승(高僧)과 왕자(王子)들이 불공양(佛供養)과 수도(修道)에서 출발(出發)하여 승려간(僧侶間)에 애음(愛飮)되었으며, 점차(漸次) 왕공(王公) 귀족사회(貴族社會)에 미쳤고 화랑도(花郞徒)의 정신수양(情神修養) 등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음다풍(飮茶風)을 가장 잘 묘사(描寫)한 것은 송인(宋人)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으로 외국(外國) 사신(使臣)에 비친 음다풍속(飮茶風俗)이 잘 나타나 있다. 「차를 손님 앞에 내놓을 때는 아주 서서히 걸어서 가져온다. 접대원이 말하기를 차를 손님 앞에 다 내어놓은 뒤에야 마시는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항시 차가 다 식어 냉차(冷茶)를 마시게 된다. 홍색 탁자에 홍사(紅紗) 보자기를 덮고 매일 3차례씩 차를 내고 더운 탕(湯)을 가져 오며 이를 약이라 하여 항상 사인(使人)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마시지 않으면 불쾌히 여기므로 항상 억지로 마신다. 」등으로 적고 토산차(土産茶)의 개량(改良)을 꾀하지 못해 맛이 쓰고 중국의 용봉차(龍鳳茶)를 구입해 아직도 산업화(産業化)를 꾀하고 있지 못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고려 때의 음다법(飮茶法)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질서(秩序)가 있으며, 다반사(茶飯事)로서 우리의 식사예법(食事禮法)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다세(茶稅) 등 관아(官衙)의 주구(誅求)가 심해 이규보(李奎報)는 산야(山野)를 불 질러 다공(茶貢)을 없애야 남민(南民)이 비로소 안도(安堵)할 것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 때 한국다도(韓國茶道)는 사원차(寺院茶), 궁중차(宮中茶), 이규보(李奎報) · 정몽주(鄭夢周) · 이인로(李仁老) 등의 문인차(文人茶) 등 주로 상류사회(上流社會)에서는 일반화(一般化)되었으나 하류사회(下流社會)에서는 다만 원망(怨望)의 대상이었다 할 수 있다.

3. 이조(李朝) · 현대(現代)의 다도(茶道)

이조(李朝) 초기(初期)에는 얼마간 고려(高麗)의 유풍(遺風)으로 음다풍(飮茶風)이 남아 있었으나 억불책(抑佛策)에 따라 자연 선가(禪家)의 습속(習俗)인 차(茶)가 쇠퇴(衰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불공(佛供)에 쓰이던 차는 청정수(淸淨水)로, 차례에 쓰이던 차는 술로 바뀌어버리고 차례(茶禮), 다식(茶食), 봉치(封茶), 곡차(穀茶), 다반사(茶飯事) 등 차의 명칭(名稱)만이 전할 뿐 실제 차(茶)는 사라지고 대용품(代用品)이 생기게 되었다. 더구나 차(茶)는 쇠퇴해도 다공(茶貢)은 잔존(殘存)하여 다른 곳에서 비싼 값으로 차를 사 바치는 등 다세(茶稅)로 민폐(民弊)가 막심하여 차나무를 파헤치는 촌극(寸劇)까지 벌어졌다.

명장(明將) 양호(楊鎬)는 선조(宣祖)에게 「귀국(貴國)은 훌륭한 차가 있어도 마시지 않고 산업화(産業化)하지 않는가. 인삼차는 차(茶)가 아니라 탕(湯)이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나 백사(百事)를 잘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거니와 이는 오늘날에도 반성하고 자각해야 할 일이다.

이처럼 사라져가는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를 부흥(復興)한 이가 있으니 초의(草衣) 의순선사로 다산(茶山) · 추사(秋史) 등과 교우하고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을 지어 한국차(韓國茶)의 맥을 이었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의 다도(茶道) 운운 할 수 있음은 오로지 초의의 역작(力作) 동다송이 있음이요, 초의는 한국의 육우(陸羽)요 동다송(東茶頌)은 한국의 다경(茶經)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다송은 뚜렷한 주체의식으로 동다(한국의 토산차)의 우수성을 역설하였고 한국의 다도(茶道)를 명쾌히 밝히고 있으니 자랑스러운 우리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조말의 중흥기(中興期)에도 한국차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개화(開化)의 물결과 함께 밀려 온 커피문화(文化)에 짓눌려 다시 자취도 찾기 힘들더니, 최근에 이르러 주체성(主體性)의 자각(自覺)과 우리 문화(文化)에 대한 의식(意識)이 성장(成長)함에 따라 차문화(茶文化) 운동(運動)이 전개(展開)되고 있다. 현대(現代)는 초의(草衣)의 다법(茶法)을 이었다 하는 대흥사(大興寺)의 응송(應松) 노장(老長)과 효당(曉堂) 등을 선구로 수많은 다인(茶人), 차연구가(茶硏究家)가 나오고 다회(茶會)가 조직되고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있으며, 정부(政府)에서도 전통문화운동(傳統文化運動)의 추진(推進)할 움직임이 있다.

Ⅲ. 한국다도(韓國茶道)의 정신(精神)

1. 한국다도(韓國茶道)의 성격(性格)

다도(茶道)는 차를 마시는 예법(禮法)을 주로 의미하나 다사(茶事) 전반(全般)에 걸쳐 행(行)해야할 도(道)로 보고, 우리 다도(茶道)의 성격(性格)은 어떠했으며 그 생활(生活)과 정신(精神),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정립시켜 나가야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重要)한 문제(問題)가 아닐 수 없다.

중국(中國)의 음다풍(飮茶風)은 다방(茶房)에서 맑은 정신을 갖고 상담(商談)을 하기위해 마시는 것과 같은 실제적(實際的)인 면(面)이 보이고, 일본(日本)의 다도(茶道)는 주로 마시는 예법(禮法)에 치중되어 지나치게 형식적(形式的)이고 까다롭다. 마치 일본(日本)의 정원(庭園)이 자연(自然)을 깎고 다듬어 거의 원형을 잃은 조형미(造形美)로 꾸미는데 비해, 한국(韓國)의 정원(庭園)은 땅을 있는 그대로 이용(利用)하여 자연(自然)과 유리(遊離)되지 않는 자연미(自然美)를 살리는 것처럼,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도 다사(茶事) 전반(全般)에 걸쳐 그 묘(妙)와 정(精)을 다하고 음다(飮茶)도 마치 식사시(食事時)와 같이 자연스러운 가운데 차의 참맛을 음미하여 형식적(形式的)이거나 까다롭지 않다.

물론 까다롭고 의례적(儀禮的)인 궁중차(宮中茶),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문인차(文人茶), 방선후(放禪後)에 선미(禪味)에 듬뿍 취해 마시던 사원차(寺院茶)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까지 명맥(命脈)을 이어오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원차(寺院茶)에서 가장 큰 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초의(草衣) 스님의 다법(茶法)을 전하고 있다는 응송계(應松系)의 차(茶)나 사원차(寺院茶)는 퍽 자유(自由)롭고 조용하며 실제적(實際的)이다. 음다(飮茶)의 형식(形式)은 존재하나 형식(形式)에 얽매이지 않는 무형식(無形式)의 형식(形式)과 내적(內的) 질서(秩序)속에 형식이 완전(完全)히 정신(精神)과 내용(內容) 속에 들어간 일체(一切)의 맛으로 자연스럽다. 선가(禪家)에서는 선(禪)을 마치고[放禪] 경행(經行)을 한 다음 자연스럽게 쭉 둘러앉으면 다각(茶角)이 단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차를 돌리고 물러나면 가까이 끌어당겨 두 손으로 조용히 마시고 소리 나지 않게 놓는다.

다화(茶話)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그 이후(以後)에는 한 손으로 마셔도 된다. 차를 더 마시고자 하면 약간 밀어 놓고 다 마셨으면 완전히 다각(茶角) 앞으로 밀어 놓는다. 청(請)하면 다각(茶角)은 다시 차를 대접하고 끝나면 조용히 찻잔을 거두어 간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된 찻종이나 붉은 보자기 까다로운 의식 등은 궁중의식상(宮中儀式上) 그러한 것 같으며, 대개 민간(民間)이나 사원(寺院)의 차(茶)는 막걸리같은 털털한 맛을 차의 맛으로 승화한 질박(質朴)하고 자연(自然)스럽고 평화(平和)로우며, 함허(涵虛) 득통선사(得通禪師)의 말처럼 ‘한 잔의 차 맛에 무량의 즐거움을 느끼는[當用一椀茶 應生無量樂]’ 다도(茶道)이다. 앞으로 생활다례(生活茶禮)를 위해서 차(茶)를 마시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처럼 자연스럽고 너무 까다롭지 않아야 하며, 대중화(大衆化)되어 일부(一部) 특수계층(特殊階層)의 전유물(專有物)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초의(草衣)의 다도관(茶道觀)을 통해 본 한국다도(韓國茶道)의 정신(精神)

동다송(東茶頌)은 31송(頌)의 원문(原文)인 시(詩)와 각(各) 주(註)를 옛 문헌(文獻)을 이용(利用) 고증하여 사실(事實 : facts)과 의견(意見 : opinion)을 명확히 구분(區分)하여 동다(東茶)의 우수성과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를 설명하면서 주체성(主體性)을 부르짖고 있다.

일본(日本)에서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다도(茶道)하면 음다지례(飮茶之禮), 음다지도(飮茶之道) 등을 이야기하나 동다송(東茶頌) · 다신전(茶神傳)에서 보듯이 초의(草衣)는 예의(禮儀)나 형식(形式)보다는 다사전반(茶事全般)에 걸친 진다(眞茶)를 만드는 과정(過程)의 묘(妙)와 정(精), 중정(中正)에 맞는 포법(泡法), 차(茶)의 신(神)과 체(體)가 어우르고[相和] 건(健)과 영(靈)을 얻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다도(茶道)라 하고 있다. 다도(茶道)하면 일본(日本)의 다도(茶道)만을 생각하고 천리휴(千利休)가 주장(主張)한 화(和) · 경(敬) · 청(淸) · 적(寂)을 마치 우리의 다도(茶道)인 양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우리의 다도(茶道)는 없다고 믿는 경향(傾向)은 한시바삐 불식(拂拭)되어야 할 것이다.

초의(草衣)는 다도(茶道)를 다신전(茶神傳)에서는 정(精) · 조(燥) · 결(潔) 3자(자)로 함축했고[ 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茶道盡矣 ] 동다송(東茶頌)에서는 평왈이하(評曰以下) 26자(字) [ 評曰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로 나타냈다. 따라서 이를 요약(要約)하면「묘(妙) · 정(精) · 중(中) · 화(和)」라 할 수 있다. 즉 차(茶)를 따서[採], 만들어[造], 우려내어[泡], 마시는[飮] 다사(茶事)에서 채묘(採妙), 조정(造精), 포중(泡中), 음화(飮和)를 다해 묘용(妙用) · 정성(精誠) · 중정(中正) · 상화(相和)를 얻는 것이다. 초의(草衣)의 다도관(茶道觀)을 도표화(圖表化)하면 다음과 같다.

묘채(妙採)된 찻잎은 화(火)의 중화(衆花)를 얻어 정조(精造)되어 정다(精茶)가 되며, 생수(生水)인 진수(眞水) 역시 화(火)의 힘으로 순숙(純熟)된 탕수(湯水)가 된다. 이 차를 물에 알맞게 우려내어[ 泡中 ] 마심으로써 신체건령(身體健靈)을 얻는다는 내용(內容)이다. 여기서 다도(茶道)의 3요소(要素)로 다(茶), 화(火), 수(水)가 있고 다도(茶道)로 들어가는 5문(門)인 채(採), 조(造), 수(水), 탕(湯), 포(泡)에 다인(茶人)이 행(行)해야할 오행(五行)인 묘(妙), 정(精), 진(眞), 숙(熟), 중(中)이 있다.

다전(茶田)의 초의(草衣) 다도해설도(茶道解說圖)

(木)       (火)         (水)      (火)

採          造           水         湯

|           |            |       |

-----            眞 ---- 熟

  │                            │

  │             泡            │

精茶 ------│------- 眞水

           (陽) (陰)

                 │

體------- (和)--------神

│              眞              │

│              茶              │

健------- (倂)--------靈

오행(五行)으로 오문(五門)을 들어가면 다신(茶神)과 (水體)가 상의상현(相依相顯) 불이불리(不二不離)하고 중정(中正)을 지나치지 않으면 건령(健靈)을 얻는다는 것이다.

초의(草衣)의 다도정신(茶道精神)을 요약(要約)하면 「묘(妙) · 정(精) · 중(中) · 화(和)」로 대표(代表)할 수 있으며, 이의 생활상(生活上)의 의미와 정신(精神)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묘(妙)는 순리(順理)에 따라 진실(眞實)을 접(接)할 때 나타나며 시기(時期)에 맞고 [철이 든다라는 말이 있다] 환경에 적합하여 거슬리지 않음이며, 정(精)은 거짓됨이 없이 신명(身命)을 다해 성실(誠實)하게 사는 인생(人生)의 자세이다. 중(中)은 중정(中正)으로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않고 중정(中正)의 정신으로 바르게 사는 생활(生活)의 지혜이며, 화(和)는 상화(相和)로 서로 화합(和合)하여 평화(平和)롭게 사는 것이다. 곧 묘(妙)와 중(中)은 자연(自然)과 일에 대한 지혜(智慧)이며, 정(精)과 화(和)는 일과 인간(人間)에 대한 우리의 노력과 자세이다. 이 묘(妙) · 정(精) · 중(中) · 화(和)는 한국(韓國) 다도정신(茶道精神)의 핵심(核心)이며 다인(茶人)이 갖춰야할 정신이고 진실(眞實)되고 성실(誠實)하고 평화(平和)롭게 사는 기본정신(基本精神)이다.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는 소박(素朴)하고 자연(自然)스럽고 무형식(無形式)의 형식(形式)으로 자연(自然)의 순리(順理)에 맞게 [妙]. 정성(精誠)을 다하고 [精], 중정(中正)의 지혜(智慧)로써 [中], 서로 화합하는 [和] 정신(精神)이라 하겠다. 다도(茶道)는 그 자체(自體)에 안주(安住)하는 폐쇄적(閉鎖的)인 것이어서는 안 되고 문화 등(文化 等) 환경(環境)과 유기적(有機的)인 관계(關係)를 가지는 개방(開放)시스템(open system)이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사회(社會) · 문화(文化)에 대한 공헌도(貢獻度)가 낮았으나 스스로 훌륭한 시스템으로 개선(改善)하여 공헌도(貢獻度)를 높여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韓國)의 다도(茶道)가 환경(環境)을 무시한 채 자체만족(自體滿足)에 머물고 말 때, 지금까지 우리 다도(茶道)가 걸어온 길의 역사적(歷史的) 교훈(敎訓)을 외면(外面)하는 길이며, 대중(大衆)을 무시한 고급유희(高級遊戱)에 그치게 되고 중국(終局)에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韓國)의 다도(茶道)를 바르게 정립하여 주체성(主體性)을 확립하고 현대사회(現代社會)의 요구(要求)에 부응하며 그 정신(精神)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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