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전통차 농업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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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조선 후기 보성의 다인과 차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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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51회 작성일 21-03-0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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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보성의 다인과 차생활

2012.12.8.

 

 

 

.들어가는 말

 

. 보성의 다인들과 차생활

1. 양다암

2. 양다잠

3. 송설주

4. 안회봉

5. 조담은

 

.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보성은 차 생산지의 자타 공인의 메카다. 그러나 차문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잘못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상인들이 차를 심은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나라 대표 차산지의 차문화가 이렇게 잘못 알려진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공룡알이 발견되는 보성은 그 역사가 심상치 않다. 보성 강변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또 보성 강변에 집중된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중심세력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다. 백제시대엔 복홀군(보성읍,미력면), 동로현(조성면 일대), 파부리현(복내면 일대), 마사랑현(회천면 일대), 분차군(벌교읍 일대)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 보성의 차 역사는 고려 때부터 보인다. 차를 공납하였던 다소(茶所). 웅치면의 웅점다소(熊岾茶所)와 회천면의 갈평다소(乫坪茶所)에서 차를 공다(貢茶)하였다. 차산지였음을 말해 준다.

 

세종실록 지리지(1433)에도 차()가 난다고 했다. 겸백면 용산1리 다동(茶洞 : 당시 이름은 차밭등). 광산 김씨 김모(金冒)가 이 차밭등에 은거할 당시(1455)에도 마을 뒤에 차나무가 많았다 한다. 조선시대 신동국여지승람(1530)에도 차()가 토산품(土産品)으로 나온다. 1741보성군지에서는 보성차의 우수성을 밝히고 있다.

 

한편 득량면 다전(茶田 : 차밭밑)1352년 창녕 조씨가 정착했다하나 족보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흥의(曺興義 : 1579~1631)은 양산항(梁山杭 :1554~1634)의 셋째 사위로 성혼 후 1600년경 박실에 정착한다. 제주 양씨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 1488~1545)의 제5자인 양응덕(梁應德 : 1523 ~ )이 박실에 정착한다. 그 아들 양산항의 다전(茶田)집에는 1597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찾아오기도 한다.

 

차밭밑의 자생차와 그 곳 다인들의 차 생활 기록은 19세기에 이르러 보인다. 양식(梁植 : 1815~1873)은 호를 다전(茶田)이라 부른만큼 차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전의 차 생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친동생인 양다암(梁茶庵 1822~1886)은 다인이며 차생활을 하였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394수의 시 중에 차시 자다(煮茶)’에서다. ‘다잠유고(茶岑遺稿)’의 여러 문인들은 다전의 아들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 : 1846~1919)의 차 생활을 증거하고 있다. ‘다잠정사(茶岑精舍)’에서 다반사(茶飯事)로 차를 마시며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보성의 대서예가이며 문장가인 설주(雪舟) 송운회(松運會 : 1874~1965).그의 설주유고(雪舟遺稿)’에는 차시 24편이 있다. 보성의 다사(茶事)와 다도(茶道)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한편 죽곡정사(竹谷精社)에서 죽곡강회(竹谷講會)를 연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 : 1873~1959). 그의 차시 전다(煎茶)’ 역시 깊은 다도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인이었던 종산 안종협, 설주 송운회, 회봉 안규용, 청람 임태정 등과 교류한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 : 1877-1945)의 차 생활 기록도 있다.

 

보성은 자생차의 중심지다. 자생차가 101, 전국 77%를 차지하는 전남의 43%, 전국의 33%. 이렇듯 차가 함께 한 보성에 차에 대한 역사, 문화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이 너무 적다. 아쉽다. 본 고에서는 몇 가지 자료로 19세기 후반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다인과 차 생활을 더듬고자 한다.

 

. 보성의 다인들

 

1. 양다암(梁茶庵)

 

다암(茶庵) 양순(梁栒 : 1822.5.21~1886.7.19)은 보성 득량 다전(茶田)부락에서 태어나고 서거했다. 1543년 박실(다전부락 포함)에 정착한 양응덕(梁應德 : 1523 ~ )의 증손, 병사공 양우급(梁禹及)7대손이다.

 

다암은 늠름한 자태에 일찍이 가훈을 몸소 실천하여 효행과 우애가 있는 군자였다. , , 경전을 애독하여 장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선비의 규범을 보였다. 더욱 시를 공부함에 풍월을 읊고 감상했다. 벗을 보낼 때는 반드시 시를 쓰고 읊었다. 선조의 문헌을 광범위하게 살펴 육첩(六帖)을 지어 전하고 병사(兵使) 구성(龜城)의 실기(實記)를 편찬했다. 시문을 지은 것이 많지만 다 흩어져 없어지고 다만 남은 것이 4백여수라 한다. 그 남은 시고가 다암시고(茶庵詩稿)’이다.

 

다암시고’(1850)는 손자 화승(禾承)에 전해졌으나 화승은 계축년(1973) 가을에 서거한다. 그 장자 동현(東炫)에게 전해지나 인쇄본(계축본)을 편찬하지 못하고 차자 동섭(東燮)이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상하로 구성되어 인쇄된 계축본은 원본 경술본과는 편찬 순서가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암공묘표’(茶庵公墓表)가 실려 다암공의 선조와 다암공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발문에서는 다암공의 면모를 수록하고 있다. 필사본으로 백련집(白蓮集)’으로 표시된 다암시고도 있다. 이 역시 편찬 순서는 전혀 원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필자가 살핀 바 필사(筆寫)도 조잡하다.

 

다암시고원본은 경술년(1850) 1월에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표지 안 목차에는 양다암 시고목록이라 하고 있다. 목록이 끝나고 본문이 시작될 때도 양다암 시고라 되어 있다. 특히 경술본은 저자 자신이 쓴 원본이라 여겨진다. 본문을 시작하면서 자신을 직접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조선 순조대왕 20년인 임오년(1822) 521일 다전에서 태어났다.(我 朝純祖大王 二十年 ~ 生于茶田)”로 적고 있다.

 

이 원본은 동현의 외아들, 다암의 5대 종손 양기열(梁基烈)이 보관하여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다암이 29세의 젊은 나이에 쓴 것이다. 5언 절구 86, 5언 율시 48, 7언 절구 139, 7언 율시 121수 등 총 394수가 수록되어 있다. 차시 자다(煮茶)’5언 율시 48수 중 36(13페이지)에 있다. 자다(煮茶)’로 다암공의 다인으로 면모와 당시 차 생활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암은 당대 차인인 초의, 추사보다 38년 뒤에 태어난다. 1세대의 차이일 뿐 거의 동시대 인물이다. 다암의 차시는 차의 제법, 차 생활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다도의 옛 전통을 따라 엄격하게 다도를 지키려는 것을 볼 때 선대의 다인과 그 문화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다암의 차시 자다(煮茶)’의 전문을 보자

 

차 끓이기

 

아홉 번 찌고 말려

신선대에 오래 두고

 

화로 끌어 석탄 때고

물 길러 오지병 연다.

 

연기 그친 우왕의 솥

눈 쓸어간 도잠의 잔

 

찻물은 옳고 그름 아니

붉은 회초리의 옛 전통

 

蒸曝九重(증구구중회)

久藏仙子坮(구장선자대)

引爐石炭(인로석탄설)

汲水金罌(급수금앵개)

烟歇禹儞鑵(연헐우이관)

雪消陶穀盃(설소도곡배)

 

瓊漿知是否(경정지시부)

遺制赭鞭來(유제자편래)

 

이 시는 차 생활 자체와 차의 제법, 다기 등 다사(茶事)를 직접 노래한 시다. 1850년대 보성, 차밭밑의 차 생활과 조선 후기 문인의 차문화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먼저 화로에 석탄을 땐 것이 이채롭다. 석탄이 1930년대에 비로소 산업화된 것을 볼 때 1850년 당시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실 천석군(千石君) 양씨 집안으로 부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다관으로 철제 오지병[금앵:金罌]을 쓴 것으로 보인다. 철주전자이다. 솥은 우왕의 솥이요, 잔은 도연명의 잔이라 부르고 있다. 다관은 우왕의 솥처럼 귀중하고 찻잔은 도연명의 술잔처럼 한가하다. 잔은 술잔을 그대로 찻잔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차의 풍류는 첫 구절에 선자대(仙子坮)’도연명의 잔에서 잘 드러난다. ‘차를 보관하는 시렁선자대(仙子坮)’로 나타낸다. ‘깨끗한 차를 오래 보관한다.’는 이미지를 준다. 다인 자신을 은근히 신선에 빗대고 있다. ‘오래 보관한다.’하니 요즈음 각광받는 보이차와 같은 후발효차(後醱酵茶)’임이 틀림없다.

 

가루차로 점다(點茶)하면 흰 눈이 쓸어간 듯하다. 찻물은 붉디 붉다. 그래서 경장(瓊漿 : 붉은 옥같은 찻물)이라 한다. 발효가 많이 되어 홍색(紅色)을 띠고 있다.

 

다암은 어떤 다인이었을까? 대단히 엄격하게 다도(茶道)와 다사(茶事)를 지킨 다인이었다.

이윽고 차를 마실 때 먼저 찻물의 빛이 눈에 들어온다. 풍류의 달인이었던 다암. 차를 마심에 그냥 무심코 마시지 않는다. 차의 붉은 빛을 본다. 맑은 지 흐린 지 고운 지. 빛이 잘 나면 잘 만든 것. 그렇지 않으면 잘못 만든 것이다. ‘찻물로 (제다의) 옳고 그름을 안다.’고 표현한다. 제대로 법제(法製)하지 않으면 빛이 다르다. 그래서 그 빛을 붉은 회초리라고까지 했다.

 

마지막 구절 자편래’(赭鞭來 : 붉은 채찍이 온다)야말로 이 시의 시안(詩眼)이다. 표현도 독특하다. (잘못 만들었을 때는) 마실 때 (차 빛깔이) 자신에게 채찍을 치는 것 같다. 다암은 차의 엄격한 다도와 예법을 따르는 다인이다. 풍류를 알고 차를 즐겼다. 단순히 마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로 뒷산의 차밭밑차를 따서 직접 전통적인 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유제’(遺制 : 오랜 차 만들고 마시는 풍습)라 한다. 민가에서 떡차를 쪄서 만드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다산, 초의 등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리 표현할 수 없다. 또 차의 제법이 초의등의 덖어 말린 배쇄단차(焙曬團茶)가 아닌 전통적인 쪄서 말린 증쇄단차(蒸曬團茶)임을 보여준다.

 

다암은 차의 엄격한 다도와 예법을 따르는 다인이었다. 풍류를 알고 즐기지만 직접 전통이 차 만드는 법대로 차를 만들어 차 생활을 했다. 물론 다전의 자생차를 따서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다암의 차 생활은 조카인 다잠에게 이어졌으리라.

 

2. 양다잠(梁茶岑)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 : 1846-1919)은 다전(茶田) 양식(梁植 : 1815~1873)4남이다. 다잠은 차를 마시는 작은 아버지 다암으로부터 충분히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40여년을 한 동네인 다전에서 살았는데 어찌 교류가 없고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다전’, ‘다암’, ‘다잠등 차 ()를 호로 삼음이 우연이 아니리라. 이 차 ()를 호로 삼은 전통은 지금까지도 후손에게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 차를 마시는 전통이 끊긴 지금까지 다전(茶田)이라는 지명과 함께

 

다잠(茶岑)은 칠순(1916년경)다잠정사(茶岑精舍)’를 짓고 시인문객과 교유하였다. 다잠정사 집 뒤엔 지금도 자생차가 대나무 사이에서 자라고 있다. 차밭과 그 마을을 다잠(茶岑) 다산(茶山) 다전(茶田) 다전하(茶田下:차밭밑) 등으로 불렀다. 1976년 발간된 다잠유고(茶岑遺稿)’전은유고(田隱遺稿)’송담유고(松潭遺稿)’와 합본인데 전은(田隱 : 梁會水)과 송담(松潭 : 梁會沺)은 다잠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다.

 

다잠(茶岑)의 다잠정사운(茶岑精舍韻)을 보면 다잠 자신은 차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조담은(曺澹隱)이 그렇듯 직접 차 생활을 합네 하고 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차 생활은 외려 더 도드라진다. 다른 시인들이 앞 다퉈 노래한 까닭이다. 안규문은 차 끓이는 소리[松風] 끊이지 않는다.(松風不斷)”한다. 그것도 일년 내내[四時秋].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黙)세 때 차를 마시고(三時煎供)”라 한다. 그야말로 밥 먹듯다반사(茶飯事)로 차를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차 화롯가에서 세월을 보낸다.(爐邊消歲月)”하니 만년 세월을 차와 함께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잠은 차를 무척 즐기었던 다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은 드러내지 않아 더욱 더 빛난다.

 

다잠(茶岑)은 자신의 호에 차 다()를 넣을 만큼 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래서 죽산(竹山) 안규문(安圭文)은 이렇게 노래한다. “차 끓이는 소리 일년 내내 끊이니 않으니 차를 호로 삼음이 어찌 우연이랴?(松風不斷四時秋 茶之揭號豈誠偶) 여기서 다잠(茶岑)이 다인이기에 차 다()자를 써서 호로 삼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약용이 해남 귤동의 뒷산 다산의 이름을 따서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삼음과 닮은꼴이다. 또 실제 차밭밑위의 차밭도 귤동처럼 다산(茶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전은유고나 다잠유고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옥전(玉田) 안규신(安圭臣)이 노래한 다잠의 차 생활을 보자.

 

차밭아래 누각엔 茶烟細起篆山樓

차 연기 가늘게 오르고

 

평지에 사는 신선 平地神仙課日遊

하루 일과는 노는 일이네

 

소동파 석가산 나무는 蘇門木假三峰頂

삼봉 정상에 있고

 

노동의 맑은 바람은 盧氏淸風七碗頭

일곱 찻잔 머리에 이네

 

노동 칠완은 당나라 시인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이 맹간의(孟諫議)로부터 차를 받고 지은 칠완의 시를 가리킨다. ‘칠완(七碗)’은 일곱 찻잔인데 차 마시는 일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안규신은 노동 7완의 노래를 노씨의 맑은 바람’[盧氏淸風]이라 한다. 여기 다잠정사에 모인 안규신을 비롯한 다인들의 풍류는 결코 노동에 뒤지지 않는다. 번뇌를 떨치니 신선의 경지까지 이르고자 한다.

 

4번째 차운으로 쓴 죽산(竹山) 안규문(安圭文)의 시에서도

 

칠완 잠시 쉬고 번뇌 떨쳐내니 七碗纔休塵念掃

봉래 신선과 함께 하는 것 같네 蓬萊仙伴卽其流

 

라고 하여 칠완자체가 차마시는 일로 쓰임을 보여준다. 봉래 신선은 유가(儒家)를 넘어 도가적(道家的)인 취향을 보여 준다.

7번째 차운인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默)의 시를 보자. 누각 주위에 차나무가 있었고 차를 세 때 올려 마신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일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은 누각에 嘉木叢叢一小樓

아름다운 차나무는 빽빽하고

 

주인과 손님 함께 어울려 主賓結社足優遊

즐겁게 노닌다.

 

반평생 맑게 닦아 半世淸修宜白面

벼슬없이 지내고

 

세 때 차를 다려 三時煎供走蒼頭

올려 마시곤 한다.

 

주인과 손님이 차를 마시며 풍류(風流)에 젖는다. 맑은 멋스러움. 오붓한 재미는 숨어 흐르는 그대와 나 사이의 은밀한 은류(隱流). ‘가목(嘉木)’은 차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후기 차인으로 유명한 초의선사는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 지으시니’(后皇嘉樹配橘德)라고 하고 있다.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의 제1송에서다. 아마 동다송의 가수(嘉樹)’가목(嘉木)’으로 했다 여겨진다. 그들이 동다송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교유하는 그들 스스로를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했다.

 

6번째 차운에서 정의현(鄭宜鉉)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누각에 高出人間第一樓

다선들이 이따금 서로 좋아 노닌다. 茶仙往往好相遊

 

라고 노래한다.

 

죽탄의 시에서 작은 누각에 차나무가 빽빽하다’(嘉木叢叢一小樓)고 한다. 8번째 차운을 쓴 선병훈(宣炳勳)한 누각 밭에 차꽃이 가득하다’(滿圃花花一草樓)한다. 다잠은 집 뒤쪽 야산인 차 언덕뿐만 아니라 다잠정사 주변에도 차를 심어 차밭을 만들었던 것 같다. 구기자, 국화를 친히 심고[정의현(鄭宜鉉)은 친재기국(親裁杞菊)이라 함] 약초까지 심었다.

 

다잠정사운에 차운을 한 10인 중 안규신, 안규문, 정의현, 황재묵 등은 직접 차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이들 다인들은 스스로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하면서 차 풍류를 즐겼다. 보성, ‘차밭밑을 중심으로. 그게 불과 90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 차밭밑의 선비들은 활발하게 차문화를 향유하였다. 주변에 차가 있고, 여유가 있고, 차를 좋아하는 다인들이 한시를 주고받으며 오갔다.

 

3. 송설주(宋雪舟)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 1874~1965)는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6살부터 92세까지 86년간 서예와 학문에 연마하여 설주체를 완성하였다. 그의 진초(眞草)입선(入禪)의 경지에 이른 신필(神筆)”이라는 평을 받았다. “보성강 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헹구는 먹물이다고 할 만큼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임종 하루 전에까지 붓을 들고 一心이라는 두 글자를 남겼다.

 

보성의 자랑할만한 한국의 명필이요, 대서예가이다. 세기의 다인(茶人)이기도 하다. 설주는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 : 1873~1959)과 깊은 교유를 나눴다. 자식들(송사현과 안종선)을 서로 친구에게 보내 가르치기[易子而敎之]도 하면서. 또 여러 시우(詩友)들과 공음(共吟), 수창(酬唱)하였다. ‘설주유고(雪舟遺稿)’ 504수의 시 중에 차시는 24수에 달한다.

 

차를 마시는 일은 다반사(茶飯事)였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밥 먹듯 한다. 죽탄이 다잠이 세 끼니때마다 마신다’[三時煎供]고 했듯. 설주는 병으로 음식을 줄이는데 차 마시는 일까지 그만 둔다.’ 아마도 너무 차를 많이 마셔 탈이 날 지경 때문이리라. 그래도 아침 저녁에는 여전히 차 끓이는 연기난다.[晨夕猶存煮茗烟]

 

정말 소박한 차 마시는 정경은 소천 임태철(小泉 任泰哲)이 찾아올 때 지은 시에 잘 나타난다. 밥 먹고 물을 마시듯 밥 마고 차를 마셨다.

 

꽃밭에 호미질 끝내고 밥 먹으러 돌아와 鋤了花田齋餉至

총각 김치에 흰밥 먹고 또 차 한잔 마시네 靑蔥白飯又茶盃

 

설주의 차는 전원생활의 벗. 서다일여(書茶一如)의 지경까지 이른다. < 국포 송종(菊圃 宋棕)의 초가집에 부쳐 >에서는 동풍 잠깐 쉬고 차향 그윽하니 / 앉아서 도연명의 글 한 부분 본다.[東風乍歇茶香熟 坐閱淵明一部書]’고 한다.

 

친구들과 손님 접대로 차를 마시는 일이 나타난 시는 3수가 있다. < 관선재(觀善齋)에서 여러 친구들과 시를 주고 받음 >에서는 아이는 목마름 알기에 차를 자주 달이고[童和喉渴頻烹茗]’라 한다. <단오날 한인암(韓忍庵)을 찾아가서>에서는 손님 위해 찻잔 기우니 찻잔에 눈 가득찬다.[爲客傾茶雪滿盃]’고 한다. 손님을 위해 차를 준비하는 정성이 배어있다. 가득 따르는 차에 정()이 듬뿍 담긴다. 이처럼 차는 친교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던 손님이 가고 나면 설주는 이렇게 손님 보내고 무료하게 읊는다. ‘옛 친구 이미 떠나 차 연기 끊겨 / 홀로 읊조린 시를 혼자서 본다.[故人已去茶煙歇 獨自吟詩獨自看]’

 

그런데 다른 차시에 잘 보이지 않는 차와 술을 함께 마셨던 기록이 여럿 보인다. 벌교 추동에 있는 남극정에서 읊은 < 남극정 차운 >에선 차와 술을 같이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라져 가는 좋은 것은 거문고, 바둑, , , 선경(仙經)이라’ < 오당(吾堂)의 집에서 주고 받으며 >에서는 단샘이 있으니 차와 술이면 마땅히 충분하고[泉甘猶足當茶酒]’라 한다. < 오정 오상렬과 같이 읊으면서 >에서는 향기론 술에 차 있으니 술 거르는 수고 하지 말라[茶兼香酒休勞釀]’고 까지 한다.

 

설주의 시에는 차보다는 술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설주는 차와 술 중에서 굳이 택하려면 차를 든다. 위와 같이 차가 있으니 술은 그만 거르라 한다. ‘술집 먼 것 어찌 꺼리리? / 샘물 차가워 차향기가 술잔보다 낫네[杏花村店遙何妨 泉冽茶香勝酒盃]’ < 후포(後圃) 양산정(梁山亭)에서 만회 (晩悔) 이병강(李炳强)과 같이 읊으면서 >에서다. 설주의 주다론(酒茶論)’차우위론(茶優位論)’이다.

설주가 송운 최재학의 별장을 찾아갔다. 일어서려는데 차 달이고 술을 내온다. 설주는 이렇게 읊는다. ‘아름다운 그대 자제들이 사랑스럽고 / 차 달이고 술 장만해 내 갈 길 만류하네.[愛是君家佳子弟 解供茶酒挽吾行]’ 차와 술은 설주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

 

차와 술을 늘 함께 마셨던 기록들이다. 일반 다인들이 차를 높이하고 술을 멀리 하는 듯 기록한 것이 많다. 그러나 다인 설주는 차나 술 모두 거리낌이 없다. 실제 차나 술이 보성 지역성과 차가 나는 향촌(鄕村)으로서 늘 함께 준비되어 접객(接客)하였음을 보여 준다.

 

일상 다반사로 차를 마시며 교유하였던 설주. 차는 또한 맑은 마음을 기르는 정신수양의 도구이기도 하였다. 관선재 남헌의 별장에서는 겸산 홍치유 등과 운을 들고 차와 오이 맑음은 마음자리 기를 수 있다.[茶瓜淸可養心官]’고 읊는다.

 

그 외에도 설주의 차시에서는 다경을 손수 필사하는 일이라든가 다전부락에서 보았듯 다()자로 호를 지어 부른 풍속을 보여준다. 천관산 아래를 지나며 다은(茶隱)’을 갑자기 만나 아무개가 여기 지난다고 세세히 전해주라부탁한다.

 

설주의 다시에서는 다양하게 당시의 차 생활을 알려준다. 차는 돌밭에 심고[石田茶] 절구에 차를 찧은데 밤이 늦으니 달빛을 받으며 달빛차를 만든다.[石臼香茶帶月舂] 떡을 만들 듯 차를 절구에 찧어 떡차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같은 잎차가 아니다. ‘차밭밑차가 후발효차인 떡차이듯 율어의 설주차도 떡차다. 증기로 쪄 절구로 쳐서 둥글게만든 병차(餠茶)였을 것이다. < 귀산정으로 청람 임태정을 찾아 읊다.>에서 둥근 달을 이뤄 차는 품성을 다투고’[茶堪鬪品團成月]라 한다. 차밭밑 양다암이 마시던 단차도 둥근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떡차를 그냥 넣어 끓여 마셨을까? 그건 아니고 가늘게 가루를 내어 가루차를 내어 끓여 마신 것 같다. 그래서 흰 눈처럼 거품이 인다. 다전의 양다암의 차시에서도 발견되니 눈 쓸어간 도연명의 찻잔이라 노래한다.

 

설주의 차시에도 두 군데나 발견된다. 손님 위해 찻잔 기우니 찻잔에 눈 가득 찬다.’[爲客傾茶雪滿盃]차솥 흰 눈처럼 차 끓어 전자(篆字) 화로향기 나고’[茶鐺沸雪篆爐香]이다. 여기서 보성에서 마시던 차는 둥근 단차를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했다 가루를 내어 끓여 마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전의 양다암 차는 지금 다관과 비슷한 철제 오지병인데 율어 설주는 차를 끓이는 솥은 귀가 있는 차솥[茶鐺]을 쓰고 있다. 다암은 석탄 화로 등을 이용했는데 설주는 전자(篆字) 무늬가 있는 화로를 사용했다.

 

다암은 석탄으로 차를 달이고 설주는 솔방울로 다린다. 더 서민적이다. 운치까지 곁들여진다. < 남헌(南軒) 선지식(宣芝植)의 원운에 차운 >을 하면서 차 부엌 밤에도 따스함은 솔방울 덕이요[茶竈夜溫松落子]’라 한다. 솔방울로 차를 달여 솔 내음 속에서 차를 음미하였던 고려 때 차 풍속이 조선말기 보성까지 이어진 것. 솔방울은 은근하여 찻물 데우기에 좋다. 또 실재로 주변에서 흔히 쉽게 구할 수 있다. 연기가 잘 나지 않고 화력 좋은 땔감인 솔방울은 화로에 담기도 좋아 차 끓이기에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 죽곡정사(竹谷精社)에서 결사(結社) >할 때도 솔방울 태워 새 차를 시험한다.[夜燃松子試新茶]

 

봄에 새 차를 처음 맛보는 것은 다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죽곡정사 이외에도 < 용산정사(龍山精社)의 작은 모임 >에서는 부뚜막에 솔바람 가득 새 차 끓이고(滿竈松風新煮茗)’한다. < 남양에 다시 이르러 >에서는 짙게 달인 새 차에 솔바람 일어 끓고(濃煎新茗松風沸)]’라고 한다.

 

귀산정(歸山亭)에서 청람 임태정(淸嵐 任泰禎)을 찾아 읊는 시에서는 장다(藏茶)’의 모습을 보여준다. ‘둥근 달을 이루니 차는 품성을 다투고 / 쪽지에 귀한 글 써 가늘게 묶어 이끼 끼네[茶堪鬪品團成月 箋貴添文細綴苔]’ 후발효차인 둥근 단차[떡차]를 글을 써서 가는 끈으로 묶어 오래 보관하고 있다.

양다암의 차 빛이 붉은색이었다. 양다암의 차와 설주의 차가 거의 차이가 없다. 설주의 차 빛도 발효가 많이 된 붉은 색을 띠었을 것이다.

 

다암의 짧은 다시에서도 차 생활과 다도를 알 수 있게 한다. 설주의 차시는 24수나 있다. 여러 다사와 다도가 하나하나 잘 나타나 있다. 시시콜콜한 차 생활 하나하나까지 알 수 있게 한다. 설주는 대문장가요 대서예가이다. 그리고 차 생활을 통해 맑은 마음자리를 갖고자 하는 다인으로서 보성의 차를 사랑하였다.

 

4. 안회봉(安晦峰)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 : 1873~1959.8.19)은 죽산(竹山) 안씨다. 조선 중기 학자이며 의병장 우봉 안방준(牛峰 安邦俊 : 1573-1654)10대 손이다. 보성군 복내면 옥평리에서 태어났다. 우봉은 스승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 : 1526.1.16~1597.11.18)을 모시고 의병을 일으켰다. 우봉은 1614년 순천 송광(당시는 보성) 안소뫼[內牛山]에 정착, 후손들은 그 정신을 이어 월빙정(月氷亭)을 짓고 선비정신을 이어온다. ‘동소산의 머슴새평민 의병장 담산 안규홍(澹山 安圭洪 : 1879~1909)이 나온다. 강직한 선비 안회봉도 우연이 아니다. 회봉은 정양 안종남(靜養 安鐘南)과 함께 담산실기(澹山實記)를 편찬하였다. 1929년 문덕면 죽산리 감각동 대원사 아래에 산앙정(山仰亭)을 지었다. 송설주, 낙천 이교천(樂川 李敎川) 등과 함께.

 

회봉은 49세가 되던 1921년 그가 살던 마을에 일제 식민지 정책에 의해 보통학교가 설립된다. 이에 반발 복내면 진봉리 진척부락에 서당인 죽곡정사(竹谷精社)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한다. 1934년 일제 압박에 문을 닫을 때까지다. 그는 쇠망하는 왕조에 도학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바로 세운다면 민족의 운명을 건질 수 있다 믿었다. 이에 유학교육을 중시하고 후진 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회봉은 23세 때 단발령이 내리자 차라리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터럭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일생을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다녔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 1836.8.24~1905.12.30.)의 임피 낙영당(樂英堂) 강회(1901.4)에 수학하면서 의리정신이 더욱 확고해졌다. 연재는 첫 만남 자리에서 어린 시절 이름 규용(圭鏞)을 규용(圭容)으로 고쳐 주었다. 도학을 할 인물로 인정주문지결(朱門旨訣)이란 책을 내려 주었다.

 

회봉은 송설주와 아주 가까웠고 죽곡정사에서 낙천 이교천, 정양 안종남, 소파 송명회, 효봉 허소, 노석 임기현, 매창 박태선, 초천 박유룡, 석하 정재욱, 계산 심기순, 담은 조병진 등과 어울렸다.

당연히 차가 빠질 리 없다. 회봉의 차를 다리며’[煎茶]를 보자.

 

차를 다리며 煎茶

 

산중에 사는 한 나그네 山中有一客

한 평생 고민도 많았지 一生孤悶多

깊은 동해 가에서 대 그리고 畵竹東海深

먼 서산에서 고사리 캐었지 採薇西山遐

 

꿈 깨니 북쪽 창문이 어둡고 夢罷北窓陰

헤진 경전은 책상에 걸쳐있네 殘經案上斜

회포가 참으로 울적도 하여 懷思正一鬱

때론 목청껏 노래 불렀지 有時發浩歌

 

아이 불러 돌솥을 씻게 하고 呼兒洗石鼎

송라 곁 찬 샘물을 뜨게 한다. 洌泉傍松蘿

이글이글한 화롯불에 삶으니 活火烹地爐

향긋한 연기는 처마를 감돌고 香煙繞檐牙

 

시냇물 소리 솔바람을 끌어와 澗響引松風

송골송골 흰 꽃을 맺누나. 鬆鬆凝白花

찻잔 면은 어찌 이다지 깨끗한 고 碗面一何潔

이슬구슬 새 연잎에 떨어지네. 露珠滴新荷

 

적과 습기를 제거할 수 있고 積濕宜除却

묵은 체증도 녹일 수 있다네 宿食可消磨

머리와 눈 맑히는 효과 얻으면 功及淸頭目

졸음을 물리침도 어찌 어려우리? 何難逐睡魔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 곳 淸風習習生

노동의 집만이 아니지 不但玉川家

동이에 술이 익지도 않았는데 樽中酒不熟

옛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故人遠相過

 

무릎 맞대고 옛 다관을 열어 促膝開舊罐

찬찬히 잔질함도 퍽 좋을 게야 細斟覺尤佳

경건하게 신명께 올리고자 敬謹用薦獻

잘 걸러 사당에 차려놓으니 筅托廟中羅

 

성인이 예법을 만들 때에 聖人制禮日

섬세하여 차 빠뜨리지 않았지 纖悉不遺他

시험 삼아 뭇 초목들 보게 試看衆草木

황금차와 같은 것 없다네. 莫如黃金茶

 

8연으로 된 긴 차시에 회봉의 처지와 차 생활이 차근차근 잘 나타나 있다. 1,2연은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생활과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북쪽 창문이 어두움은 망국의 조정을 상징하기도 하다. 책상에 걸쳐있는 남은 경전은 선비정신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도 같다. 그런 우울함과 울적함을 달래려고 호탕한 노래 불렀지. 회봉은 음풍농월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 것이다. 여기서는 차를 마시면서 이를 풀고자 한다.

 

3,4연은 물 긷고 불 피워 차 끓이는 다사(茶事)가 표현된다. 차 끓이는 소리인 송풍회우성(松風檜雨聲)에서 자연의 시냇물 소리와 솔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이것을 끌어[] 왔다.’ 한다. ‘흰 꽃[白花]이 핀다는 것은 쪄서 만든 떡차를 가루차로 만들어 끓이는 자다법(煮茶法)’에 따라 다선(茶筅)으로 젓는 점다(點茶)’에 의해 생기는 흰 거품을 말한다. 다암과 설주는 흰 눈[]’으로 나타낸 것과 같다. 깨끗한 차사발에 마시는 것을 새 연잎에 이슬구슬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회봉이 쓰던 차사발은 새 연잎 색인 연녹색의 청자 계통임을 알 수 있다.

 

5연은 차의 효능이다. 약차로 쌓인 적()과 습기를 제거하고 소화가 잘되게 하고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졸음을 물리치는 각성효과를 들고 있다.

 

6연에서 가난함 속에서도 차를 마시며 정신적인 고양을 꿈꾼다. 노동만 차를 마시더냐? 회봉은 노동의 옥천가(玉川家)같은 회봉차(晦峰茶)’의 가풍을 노래한다. 다잠이 노동 칠완(七椀)을 노래하듯.

6연과 7연은 설주의 다시에서도 다수 발견되는 접객(接客)의 기능이다. 옛 친구가 멀리서 오면 무릎 맞대고 옛 다관 열어 천천히 잔질하는 퍽 좋을 게야. 친구도 옛 친구가 좋고 다관도 늘 쓰던 옛 다관이 좋다. 새롭게 만나니 차는 새 차가 좋다. 그 새 차는 뒤에 언급되는 봄보다 먼저 싹 틔우는 황금아(黃金芽). 공자가 말한 군자삼락(君子三樂)중 하나인 옛 친구가 멀리 찾아온 기쁨은 차를 같이 마시면서 즐거움이 더한다.

 

7연은 차례(茶禮)로 제사 등에 쓰이고 있다. 회봉의 차시에서는 사라져간 차례(茶禮)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회봉은 단발령에도 끝까지 상투를 틀었다. 옛 것을 지키고 선비정신을 고집한다. 옛 성인들이 차로 차례를 올리던 것까지 그대로 행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다암이 차 빛으로 스스로 채찍질하여 엄격하게 다도로 자신을 수양하던 것과 같은 엄숙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8연은 백초(百草) 중 차의 우수성을 말하고 있다. 황금차(黃金茶)는 이른 봄에 나오는 노란 빛의 새 차 싹을 이른 것이다. 맹간의(孟諫議)로부터 새 차를 받고 지은 노동의 다가(茶歌)의 황금아(黃金芽)를 이른 듯하다. 이 한편의 차시는 회봉의 차생활과 차풍류 차정신 등 모든 것을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5. 조담은(曺澹隱)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 : 1877.5.23.~1945.12.15.)의 초명은 병관(秉官), 자는 문홍(文洪)이다. 전남 보성군 율어면 장동리 2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출사하지 않았다. 1929년에는 율어면 장동리 산3번지 오루굴[오류촌(五柳村)]에 담은정(澹隱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주위에서는 박학다식한 올곧은 선비로 조맹자(曺孟子)’라 존경하여 칭송하였다 한다. 훈몽서(訓蒙書)를 짓고 성리학을 가르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하생과 사림들이 그 업적을 환여승람(寰輿勝覽)에 실었다. 훈몽서(訓蒙書)는 전하지 않고 담은시집(澹隱詩集)담은정시집(澹隱亭詩集)이 전한다. ‘담은시집은 보성의 자연과 사람 등을 읊은 115수의 담은의 한시집이다. ‘담은정시집은 담은공의 담은정(澹隱亭) 시문(詩文)과 담은정팔경시(澹隱亭八景詩)에 보성 인근의 89명의 문사들이 화답한 120수의 시문집이다. 이 두 유고집은 필자인 증손 다전(茶田) 조석현(曺錫鉉 : 1957.1.16.~ )이 한글 세대를 위해 한글로 번역하였다.

 

공은 세조의 왕위 찬탈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집현전 부제학 정제 조상치(靜齋 曺尙治)의 후손이다. 보성 입향조 조대관(曺大觀)1586년 입보성(入寶城)한 뒤 다전의 양산항의 셋째 사위가 된 조흥의(曺興矣 : 1579.8.7~1643.11.4)이래 다전에서 살다 조응진(曺膺振 : 1792.4.22.~1852.12.23.)은 율어로 이사 간다. 공이 살던 율어는 1455년 이미 자생차가 있었다는 겸백면 차밭등과도 가깝다. 또 자생차가 있는 차밭밑다잠(茶岑)의 둘째 양회선(梁會宣)의 장녀 양승남(梁承男)을 며느리로 맞이하니 차와 인연이 각별하다. 다잠의 첫째인 전은 양회수(田隱 梁會水)와는 서로 교유하는 벗이다. 전은은 담은원운의 화답시와 담은정팔경시의 차운을 남기고 담은은 전은의 회갑에 시를 남긴다.

 

또한 담은은 당시의 보성 다인인 종산 안종협, 설주 송운회, 회봉 안규용, 청람 임태정 등과 교유한다. 90명의담은정시단(澹隱亭詩壇)엔 참판 양정 박남현, 소파 송명회, 설주 송운회, 몽희 조태승, 정양 안종남, 간천 이교천, 죽산 안규화, 석남 임옥현, 송원 박원수, 삼인 김졍제 등이 있다.

 

담은은 차자(茶字)’가 들어 있는 차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약차으로 를 대신해 쓰고 있다. 담은시집 제28수의 < 적벽을 지나며 동복에 있는 >에서는 스님은 약차 다리니 푸른 연기 오른다.[僧爐煎藥生紫烟]’ 는 구절이 있다. 당시에 차가 약으로 쓰인 예가 많아 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절에서 차를 마시는 풍속이 있어 약보다는 차를 다리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다. 아래와 같이 손님이 와서 차를 다리지 약을 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서늘한 풀과 나무 / 하늘 해 뉘엿뉘엿

그림 같은 붉은 벽 / 내에 잠긴 그림자

배 손님 시 읊는데 / 밝은 달 또 오르고

스님은 차 다리니 / 푸른 연기 오른다.

밤새는 무리지어 / 남으로 날아가고

봄 제지 집을 지어 / 벼랑에 매달았다.

망미정 정자에서 / 노래가 아름답고

천 년 전 소동파가 / 나와 함께 와 있다.

 

적벽 부근에 유마사라는 절이 있고 망미정의 정자가 있는데 적벽에서 소동파가 뱃놀이를 하듯 적벽에서 즐긴다. 밤배 놀이를 마치고 스님의 차 한 잔을 마시고 망미정에서 노래한다. 차는 선비들의 교유와 풍류와 함께 한다.

 

담은정시집엔 다인이었던 회봉의 시는 보이지 않으나 담은시집엔 담은이 회봉에게 쓴 < 죽곡강회 안규용 >의 시가 있다. 담은이 죽곡정사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또 보성의 대표적인 다인인 설주는 담은의 담은원운에 화답시를 남긴다. 이 시는 설주유고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담은정팔경시에 화답한 팔경시는 설주유고에는 누락되어 있고 담은정시집에만 남아 있다. 설주는 담은의 은거에 대해 이렇게 읊는다.

 

집 옮겨 그대 은거 따르고 싶지만

조용한 은거 못하고 약속만 한다.

 

담은은 오류(五柳)선생 도연명처럼 집 주위에 오류(五柳)를 심고 담은정에 은거하며 이렇게 산다.

 

존제산 앞 / 몇 칸 띳집에

지팡이 나막신 걸어두고 / 스스로 노는 이 됐다.

한창 때 누린 뜬 영화는 / 산굴에서 피는 구름이요

보통 사람들 맑은 뜻은 / 구름에서 나온 달이라

집 근처 버들가지 / 봄 먼저 와 있고

골짜기 뒤덮은 꽃 / 전할 수 없어라

이 땅은 신령을 / 기다릴 만하니

시 취한 늙은 이 / 사철 즐겨 산다.

 

담은의 은거한 도()는 혼자 골짜기 피는 꽃이라. 전할 수 없어라. 그의 차 생활도 직접 언급하지 않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석남 임옥현(石南 任玉鉉)은 담은의 은거생활을 전하는 가운데 다인으로서 차 생활을 하는 담은을 이렇게 그린다. “혹은 높은 곳을 오르고 혹은 읊조리며 오간다. 또 상에서 그림을 그리고 화로에서 차를 다리고[烹茶一爐] 책을 검열하니 날이 저문 줄 모른다.” 가세가 기운 담은은 가난하여 차를 마시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자생차가 나는 지역이라 차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담은(澹隱)은 그 호() 그대로 담은의 차 생활과 다도도 스스로 나타내지 않고 담담히 숨었다. 그러나 석남이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담은은 스스로 바깥 것들이 이에 섞이지 않아 담()이라 한다. 오호라! 나라.” 이렇게 떳떳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까지 말한다. “자연의 기운을 따르고 노닌다. 욕심없이 무위(無爲)의 장에서 천명(天命)을 즐긴다. 어찌 다시 의심하리?” 담은의 차 생활은 자연과 함께 담담하게 무위의 은거생활과 함께하는 무위차(無爲茶)’라 할 만하다.

 

또 담은 자신은 선도의 깊은 경지까지 도를 닦아 성취한 선도인(仙道人)이기도 하다. 담은시집 21수의 < 속마음을 이야기함 > 에서는 오직 단전 지키기 / 오로지 다그칠 뿐 // 묘한 이치 따라서 / 항상 다시 돌리면 / 앞으로 큰 열매가 / 봄기운을 전하리.”라고 하여 선도인으로 선도 수도를 하고 있음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42수에서는 음양호흡으로 원기(元氣)를 키운다.”한다. 84수에서는 늙도록 학문은 못 이뤄 / 어찌 낫다 하리오? // 오래 단전 지켜서 / 진정 떠나지 않네라고 한다. 유가(儒家)의 학문은 늙어도 이루지 못하고 선가(仙家)의 도는 진정 떠나지 않는다 한다. 담은이 전할 수 없는 꽃소식 즉 도()의 소식은 실로 선도(仙道)였던 것이다.

 

25수에서는 신령을 부르니 / 다행히 돌보고 // 기운이 있나니 비로소 이뤘네.”하여 도()를 성취한 부분이 보인다. 실제 담은은 1945.12.15 임종시 좌탈입망(坐脫立亡)의 법을 보인다. 왼발을 오른발 위로 꼬고 정좌(靜坐)하여 책을 든 채좌탈(坐脫)하였다. 손자인 경파(炅坡) 조규호(曺圭浩:1933.2.23~2008.4.14)는 할아버지께서 책을 읽고 계신 것으로만 알았다한다. 담은이 마시는 무위의 차는 날이 저문 줄 모르고 차를 마신다. 신선의 경지를 노니는선다일여(仙茶一如)다도(茶道)의 경지를 보여준다.

 

담은은 예지력까지 보인다. 112< 조선 독립 >의 시에서는 하늘 기운은 / 후천 개벽 돌아든다. 다른 이 즐거워하나 / 나 홀로 걱정하나니 // 지금부터 시일이 / 촉박함을 아나니라 한다. 해방(1945.8.15)을 맞아 좋아만 하나 담은은 이미 이후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예측한 듯하다. 1945.9.6. 건준 이후 가을에 지은 시 113수에서는 만 집이 티끌없이 / 먼저 흰 빛을 받으니 // 우리나라가 동방에 있음이 / 최고 다행이구나.”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축복받은 나라, 의인(義人)의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한 시다. 우리나라가 날로 성장하고 한류(韓流)가 전 세계로 나아가고 한국을 배우려 하는 요즈음. ‘동방의 빛이 될 것이라 예언이 정말 실현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담은의 차는 담담히 숨은은사차(隱士茶).무위차(無爲茶), 선도수행의 벗으로 선다일여(仙茶一如)를 보여준선도차(仙道茶)이다.

 

. 나오는 말

 

이상 19세기부터 일제 강점기 차의 산지인 보성의 몇몇 다인들과 그의 차 생활을 살펴 보았다. 보성은 자생차의 본향인만큼 차와 다인들의 생활은 다른 어느 곳보다 활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발굴되지 않고 있다. 최근세 일제 이후 상업적인 다원 조성과 그로 인한 차산지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살폈듯 보성의 다인들은 인근에서 자생하는 보성의 차와 함께 숨 쉬어 왔다. 친구와 시와 술과 함께. 그리고 은거하면서 도를 닦으면서. 또한 일반 서민들은 약용으로 감기약 즉 고뿔차로 마셔왔다고 구전(口傳)된다. 자생차의 산지 다전(茶田)에서도 선친으로부터 감기약으로 차를 끓여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성차의 역사는 발굴되는 만큼 계속 확장되고 시대가 거슬러 올라가리라고 본다. 각 문중이나 자손들의 집에 문집에서 차시 등이 앞으로도 많이 발굴되기를 바라면서 본 고가 한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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